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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019-08-04
이사야서 풀어쓴 성경
책 소개
이사야서 풀어쓴 성경/강산/헤르몬/정현욱 편집인
강산 목사가 이사야서를 번역했다는 소문을 듣고 놀라움과 걱정이 동시에 들었다 . 먼저 히브리어 원어를 직접 번역했다는 것은 히브리어뿐 아니라 당시 시대적 배경에도 정통해한다 . 필자가 보기에 강산 목사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 . 그럼에도 걱정이 드는 이유는 성경 번역이 너무나 어렵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. 성경 번역이 얼마나 어려운지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. 신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의 하나인 ‘ 사도 ’ 의 헬라어는 ‘ 아포스톨로스 (ἀ πόστολος )’ 이다 . 이 단어는 ‘ 아포스텔레오 (ἀ ποστέλλω )’ 라는 단어에서 왔는데 , ‘ 내가 보낸다 ’ 의 뜻을 가지고 있다 . 그렇게 때문에 사도는 ‘ 보냄을 받는 자 ’ 로 줄곧 해석해왔다 . 그런데 ‘ 아포스텔레오 (ἀ ποστέλλω )’ 라는 단어는 ‘~ 으로부터 ’ 의 뜻을 가진 ‘ἀ πό ’ 와 ‘ 모으다 ’ ‘ 준비하다 ’ ‘ 함께하다 ’ 의 뜻을 가진 ‘ 스텔레오 ( στέλλω )’ 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구조이다 . 그래서 고전 헬라어에서는 ‘ 아포스텔레오 (ἀ ποστέλλω )’ 가 함대 원정 , 또는 원정 지휘자 , 출항 준비가 된 배 , 적하 ( 積荷 ) 증권 , 송장 , 송신 ( 送信 ), 사신 , 사절 듯의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. 그러나 신약에서는 독특하게 ‘ 사신 ’ 또는 ‘ 사자 ’ 의 한정된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. 우리가 일반적으로 드는 ‘ 보냄을 받은 자 ’ 라는 의미는 사도 ( 아포스톨로스 , ἀ πόστολος ) 란 뜻을 크게 해치지는 않지만 매우 협소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. 또 다른 예를 보자. 고린도 전서 4:1 에 보면 바울은 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” 라고 말한다 . 그런데 이곳에서 중요한 단어인 ‘ 일꾼 ’ 이란 헬라어는 ‘ 휘페레타스 (ὑ πηρέτας )’ 이다 . 이 단어 역시 ‘~ 의 아래 ’ 의 뜻을 가진 ‘ὑ πό ’ 와 ‘ 노를 젓다 ’ 인 ‘ἐ ρέτης ’ 의 합성명사이다 . 이 단어 고대 헬라어에서 사공이나 노예 등을 뜻했다 . 그래서 적지 않은 학자들이 단호하게 일꾼의 원래 뜻이 노예였다고 확정 짓는다 . 성경 주석가는 이곳에서 더 은혜로운 상상을 더해 ‘ 삼단노가 있는 겔리선의 가장 낮은 자리에 앉은 사람 ’ 이라고 말한다 . 벤허에 나오는 주인공 벤허가 바로 겔리선에서 노를 젓는 노예였다 . 그런데 기이하게도 고대 문헌 속에서는 단 한 번도 ‘ὑ πηρέτας ’ 가 문맥 상 ‘ 사공 ’ 으로 사용된 적이 없다 . 그렇기 때문에 ‘ 일꾼 ’ 의 헬라어 단어 ‘ 휘페레타스 (ὑ πηρέτας )’ 를 갤러리에서 노를 젓는 노예로 고정 시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 . '사도'와'일꾼'이란 단 두 개의 단어만을 예로 들었지만 , 성경야 번역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. 단지 단어만의 문제만 있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. 2 천 년에서 5 천 년이 지나 성경을 번역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수 밖에 없다 . 너무나 쉬운 단어인 ‘ 레헴 ’ 도 한글성경은 그냥 ‘ 떡 ’ 으로 번역했지만 , 현대 한국 상황 속에서 떡이란 감은 그리 옳아 보이지 않는다 . 그렇다면 베들레헴은 떡집이 되고 , 예수님은 하늘에서 온 ‘ 떡 ’ 이 된다 . 그렇다고 ‘ 빵 ’ 이라고 할 수도 없고 , ‘ 밥 ’ 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. 사실 , ‘ 떡 ’ 이란 단어는 아직도 성경 번역가들에게 가장 큰 고충 중의 하나이다 . 그래서 번역가들이 비록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만 번역이 아닌 ‘ 반역자 ’ 라는 말을 들어야 했는지 이해할만하다 . 어디 그뿐인가 ? 신성한 ? 성경의 언어를 한글로 옮기는 것 자체도 큰 모험이 아닐 수 없다 . 그럼에도 성경은 번역되어야 한다 . 우리가 성경을 읽기 위해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배워야 한다면 누가 감히 성경을 읽을 수 있겠는가 ? 성경 번역은 이처럼 위험하고 반역자로 모함 받을 수 있지만 , 그것을 감수하면서 번역되어야 만 한다 . 왜냐하면 모든 민족과 방언과 족속이 복음을 들어야 하고 ,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.
번역 소식에 가장 처음 들었던 생각은 ‘ 직역일까 의역일까 ’ 였다 . 보수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직역에 가까운 번역을 했을 것이다 . 직역은 성경의 뜻과 가장 가깝다 . 그러나 직역은 맛없는 만찬과 같아서 도무지 읽을 맛이 나지 않는다 . 또한 이해할 수 없는 단어도 그대로 옮겨야 하기 때문에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 되기 십상이다 . 영어 성경인 American Standard Version(ASV, 1901) 가 이에 해당된다 . 그러나 또 다른 한 편으로 어린 자녀들이나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완전히 의역한 Living Bible(TLB, 1971) 가 있다 . 성경 번역가는 들은 직역과 의역 사이에서 고민하며 갈등하며 ,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묻는다 .
강산 목사는 직역일까 ? 의역일까 ? 단순한 생각으로 책을 펼쳐 드는 순간 깜짝 놀랐다 . 단순히 직역 의역만을 생각한다면 의역에 가까운 번역이다 . 그러나 강산 목사의 번역은 단순한 의역을 수준을 월등히 띄어 넘고 있다 .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정확하게 풀어내고 있었다 . 필자도 종종 그렇지만 , 목회자들이나 교수들은 지나치게 현학적이거나 불필요한 수식어구과 문어체로 가공된 문장들로 신학의 성을 쌓아 올린다 .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듣기 힘든 글도 적지 않다 . 그런데 강산 목사의 번역은 바로 곁에서 친구가 어제 있었던 일을 들려주는 것 같다 .
이사야 1:11-14 개정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강산 목사의 번역 “ 너희는 지금까지 형식적인 예배와 제사만 드렸다 .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경외하지도 않으면서 드린 그 많은 동물 제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?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동물의 피와 기름이겠느냐 ? 마음에도 없는 절기 예배와 집회와 모임으로 오히려 내 마음은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혐오는 느낀다 .” 강산의 목사의 번역은 확실히 의역이다 . 그러나 기존의 의역과는 상당히 다르다 . 마치 원문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을 시대에 맞는 언어로 다시 해석하여 들려준다 . 성경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기보다 문자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려는 치열함이 느껴진다 . 전반적인 흐름 상 , 성경의 흐름과 사상을 알지 못하고는 도무지 알아낼 수 없는 미묘한 감정들을 잡아낸다 . 5 장 8 절과 11 절의 시작은 ‘ 화가 있을 진저 ’ 로 표현된다 . 과연 맞은 번역일까 ? 8 절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
주의하여 볼 곳은 서두인 ‘ 호이 ( )’ 라는 단어다 . ‘ 호이 ’ 는 격앙된 감정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 . 큰 비탄에 빠져 한탄하는 형식의 외침이나 타인을 저주하는 듯한 격한 감정의 상태를 드러낸다 . 또한 문장 가장 앞에 둠으로 감정의 상태를 강조하고 있다 . 그런데 직역에 가까운 한글성경은'호이'를 문장의 끝에 두었으며 , 냉정한 상태로 주저를 선포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. 강산 목사는 이 단어를 서두에 집어 넣어 이렇게 번역했다 . “ 비참하구나 ! 그들이 삶에 맺은 첫 번째 나쁜 열매는 ‘ 탐욕 ’ 이다 .” 11 절 역시 동일하게 문장 서두에 넣어 ‘ 비참하도다 !’ 로 번역했다 . 참으로 놀랍지 않는가.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전달해 주는 멋진 번역이다. 실제로 이러한 번역은 원서에 어느 정도 감이 없거나 성경을 다독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구문들이다 . 강산 목사의 특출함은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하나하나를 원문과 비교해가면 원문이 가진 의미들을 왜곡시키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적절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번역했다는 점이다 . 쉬지 않고 1-5 장까지 읽어가면 이전에 성경을 읽을 때의 딱딱함이나 무거움은 감소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외침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. 각 장마다 저자의 묵상 글이 짤막하게 올라가 있다 . 마치 선지자의 외침을 듣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예리하다 . 어떤 면에서 강산 목사의 번역은 유진 피터슨의 < 메시지 > 성경보다 우월하다 . 영혼을 후펴파는듯한 각성을 일으킨다 . 그런 점에서 강산 목사의 번역은 의역이지만 , 영혼의 충격을 주는 탁월한 의역이라 감히 말한다 . 이사야서를 설교하는 목회자나 이사야서를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. 정말 좋은 책이다 .